\"엘프를 성노예로 샀다고? 자네 제정신인가!?\"
그게 그렇게까지 놀랄 일인가. 호들갑도 유분수지. 무시하며 홍차나 따르려는데 상인의 낯빛이 심상치 않다.
장난을 치려는 게 아니었나? 이쯤 되자 이쪽도 덩달아 기분이 술렁이기 시작한다. 대체 뭔데? 엘프가 뭐 어쨌다고?
\"이봐...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확실히 어린 년이겠지?\"
\"어? 어어. 어리다면 어린 년이지.\"
\"몇 살인가?\"
\"이제 이백 오십살이 조금 넘었어. 엘프가 보통 천 년을 사니까 인간 나이로 치면 스물 다섯...\"
\"이런 미친!\"
농담이 재미가 없다지만 욕은 좀 너무하지 않은가. 사람 무안하게.
\"이백 오십살의 엘프라고?\"
그런데 상인은 내 농담에 놀란 게 아닌 모양이었다.
\"이보게. 정신 차려. 아직 집에 들이지 않았다면 지금이라도 구매를 취소하란 말일세.\"
\"취소라니? 이미 열흘 전부터 우리 집에서 살고 있는데?\"
\"이런 멍청한! 자네는 엘프에 대해서 몰라도 너무 모르는군!\"
모르긴 왜 몰라. 늘씬하고 예쁘고 오래 살고... 생각해보니 잘 모르긴 하네.
\"호들갑 그만 떨고 왜 그러는지 말이나 좀 해줘봐. 대체 왜 그러는데?\"
\"하아. 알겠네. 내 쉽게 설명해줌세. 기본적으로 엘프들은 정령 친화력과 마법적 통찰력을 타고나네.\"
\"그거야 나도 알지.\"
\"자. 그럼 잘 생각해보게. 단순히 살아가기만 해도 마나 용적이 인간들의 배 이상으로 커지는 엘프가 백 살이 넘으면? 내로라하는 마법사들도 한 수 접고 들어갈 정도로 강력한 경지에 오르네.\"
\"어... 진짜?\"
\"내가 거짓말을 왜 하겠나. 거기다 자네가 들인 엘프가 이백 오십 살이라면... 이미 대마법사의 수준에 올랐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야.\"
듣다보니 식은땀이 흐른다.
\"그럼 왜 노예로 잡힌 건데? 대마법사의 경지에 올랐다면 대수림에 살고 있는 엘프가 노예 사냥꾼들에게 잡힐 리가 없잖아.\"
\"잡힌 게 아니라 잡혀준 걸세. 이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원.\"
\"잡혀줘? 대체 왜?\"
\"일상에 권태로움을 느낀 게지. 새로운 자극이 필요했던 거고.\"
\"그렇다고 노예를 자처해?\"
\"성정이 좀 변태적인 엘프일수도.\"
그러니까, 상인의 말은 어느 변태적인 엘프가 일상의 권태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취미삼아 노예를 자처했다는 소리였다.
그게 말이 되나? 하도 어처구니가 없는 바람에 현실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찻잔에 담긴 홍차가 식어가는 걸 가만히 내려다보던 내가 문득 드는 생각에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상관없지 않아? 노예 각인을 찍어놓았으니 무슨 수를 써도 나한테 반항하지 못해.\"
\"자네는 상인을 안 해서 다행이야. 그런 머리 수완이면 일 년 안에 패가망신 했을 테니.\"
\"그건 또 뭔 소리야. 알아듣게 말해.\"
\"하. 알겠네. 자네는 노예 각인을 누가 새겨준다고 생각하나?\"
\"그야 마경의 흑마법사들이...?\"
어, 잠깐만. 제아무리 마법에 미친 흑마법사라고 해도 대마법사의 반열에 들 수는 없는 거 아닌가?
\"끽해봐야 백 년을 사는 마경의 흑마법사들이 부여한 각인을, 이백 오십 년간 마법을 사용해 온 엘프가 풀지 못할 거라 보는가?\"
\"그럼 왜 노예 각인을...?\"
\"아까 말했지 않은가. 자네를 가지고 노는 거라고.\"
섬칫 어깨가 떨린다. 내가 근처에 가기만 해도 벌벌 떠는 엘프 노예가 사실은 날 가지고 노는 거라고?
말도 안 돼.
그래. 말이 안 되는 소리다.
저 상인은 나를 골려주기 위해 헛소리를 하는 게 틀림없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남은 홍차를 비워버렸다.
*
저택에 들어오자 거적대기나 마찬가지인 옷을 입은 엘프가 도게자를 한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 어서오세요 주, 주인님...\"
평소와 다름없는 행동. 어눌한 말투는 여전히 신경을 거슬리게 만든다.
그래도 야단을 치지는 않았다. 상인의 호들갑 때문인지 오늘은 뭔가... 주의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으니까.
\"식사부터 하지.\"
\"네, 네에...\"
공손하게 대답한 엘프가 자리에서 일어나 식사를 준비하러 떠났다.
나는 내 방으로 돌아간 뒤 간단한 세면을 하고 식당에 들어섰다. 식탁에는 엘프가 한 요리들로 진수성찬을 이루고 있었다.
반면에 엘프가 먹을 음식은 식탁 아래에 마련되어 있다. 어제 먹다 남은 음식물 쓰레기를 대충 비벼넣은, 개밥만도 못한 것이다.
엘프를 한 번 흘겨본 나는 식탁 앞에 앉아서 수저를 들었다.
\"먹지.\"
내 말을 기다렸다는 듯 엘프가 바닥에 납짝 엎드려서 개밥을 먹으려 들었다.
평소와도 같은 행동이지만 오늘은 뭔가 껄끄럽다. 내가 손을 들어 제지한 다음 엘프를 붙잡아 일으켰다.
\"오늘은 식탁에 앉아 먹도록 해라.\"
\"네, 네에...? 아니, 아니에요... 저 같은 되먹지 못한 쓰레기는 감히 주인님과 겸상할 수 없는 거예요... 부디 주인님의 발치에서 어제 주인님이 먹다 남은 찌꺼기를 처리하게 해, 해주세요...\"
\"괜찮다. 혼내지 않으마.\"
\"그, 그런...\"
엘프는 묘한 신음소리를 내더니 식탁 앞에 앉았다. 그리고는 깨작깨작 음식을 집어먹기 시작했다.
기쁘지 않은 건가? 그 모습을 잠깐 지켜보던 나는 대수롭지 않게 식사를 마쳤다.
\"와인.\"
에프터로 먹기 위해 와인을 가져오라 시키니 엘프는 밥을 먹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와인을 들고 돌아왔다.
문제는 중간에 발이 엇갈린 모양인지 넘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앗...!\"
외마디 비명과 함께, 와장창! 내가 아끼던 와인병이 박살나며 노면을 불그스름하게 물들였다.
\"주, 주인님 제가 죽을 짓을...!\"
엘프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부복한다. 익숙한 뒷머리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그 어떠한 벌이든지 달게 받겠습니다...! 죄에, 죄송합니다...!\"
화가 머리 끝까지 차올랐으나 이번 한 번은 봐주기로 하였다. 내가 한숨을 푹 내쉬며 손을 휘저었다.
\"되었다. 내가 치울테니 너는 방으로 들어가 있어라.\"
\"넷...? 주인님...?\"
\"괜찮다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하지만 저는 벌을 받아야...!\"
\"토달지 마라.\"
내가 말을 끊어버리니 엘프의 표정이 단번에 싸늘해졌다.
창백해진 것이 아니다. 싸늘해진 것이다. 미묘한 차이였지만 나는 분명 알 수 있었다.
\"오늘의 주인님은 어쩐지... 상냥하시네요...\"
짜내듯 내뱉은 말. 엘프는 그 말을 남기고는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나는 그때를 노려서 엘프의 방에 설치해두었던 감시 오브젝트를 가동시켰다.
혹시 몰라 설치해뒀는데 이번 기회에 써보는 것이다.
끼이익─.
문이 열리는 소리. 뒤이어 엘프가 들어와서 침대에 걸터앉는 게 보인다.
엘프는 공허한 눈빛으로 정면을 응시하더니 경멸어린 미소를 머금었다.
\"제 역할도 제대로 못하네. 건방진 새끼가. 죽여 버릴까.\"
더없이 냉소적인 목소리에 등골이 오싹해진다. 설마. 설마 상인이 했던 말이 전부 정답이었나?
이 엘프는 학대당하는 것을 즐기기 위해서 나한테 팔려온 거라고? 목격한 진실이 너무나 터무니없다. 나는 입을 틀어막은 채 낮게 침음하였다.
\"다른 주인을 알아봐야 하나...\"
엘프의 손에 피어오른 마나가 날카로운 예기를 띈다.
이런 씨발! 당황한 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근처의 서랍을 뒤적거렸다.
아무거나 잡히는 것을 하나 꺼내들고 계단을 타고 올라 엘프가 있는 방을 벌컥 열었다.
\"엣...?\"
방금 전까지 나를 씹고 있었던 주제에, 엘프는 순진무구한 눈방울로 나를 쳐다보았다.
\"주, 주인님... 어째서... 오늘은 쉬게 해주신다고...\"
처음에는 저 바들바들 떠는 모습이 귀엽게 느껴졌지만 이제는 역겨운 연기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티를 내면 내가 저 엘프한테 죽는다. 이제 여기서 뭘 해야하지? 머릿속 주판을 최대한 굴리던 나는 손에 개목걸이가 잡혀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서랍 속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마음이 바뀌었다.\"
최대한 침착하게. 나는 평소와 같은 억양을 내뱉으며, 엘프를 향해 개목걸이를 집어던졌다.
\"오늘은 알몸 산책이다. 버러지 같은 년.\"
\"아, 알몸 산책이요...?\"
엘프가 경악한다. 아니, 경악을 연기하고 있었다. 입 꼬리가 미묘하게 히죽거리는 게 그 증거였다.
\"주... 주인님 그것만은... 제발 용서해주세요...\"
미친년. 나는 억하심정이 올라오려는 것을 꾹 참으며 말문을 열었다.
\"알몸 산책 이후에는 성고문 시간을 갖도록 하지.\"
내가 살기 위해서는 저 정신나간 엘프를 조교해야만... 아니, 조교하는 연기를 해야만 한다.
서늘한 밤. 풀벌레가 지저귀는 소리가 고즈넉한 중정은 내가 참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였다.
다채롭게 펼쳐진 꽃밭은 물론, 내 아버지의 석상이 중정의 중앙에 위치하여 귀족적인 공간임을 한껏 과시하고 있었고, 중정의 주변을 가로막고 있는 회랑의 기둥은 이곳이 신성한 장소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먼 선조께서 이 저택을 만드신 이례, 조상들이 대대로 책무를 느끼며 관리해온 고풍스런 중정에서 난 무얼 하고 있는가? 무척이나 명예롭게도 엘프 노예를 산책시키고 있었다.
“주… 주인니이이임… 그만 용서해 주세요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바닥을 기고 있는 엘프의 목에 가죽 목걸이가 걸려있다. 목걸이의 줄은 당연하게도 내 손에 들려있었다.
‘시발….’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이 행위에 대해 그 어떠한 즐거움도 느끼지 못하였다.
배덕감을 느끼지 않냐고? 느끼고 있긴 하지. 조상들이 관리해온 중정을 엘프 노예로 더럽히고 있다는 게 배덕감이라면 배덕감이었다.
근데 그 배덕감이 쾌감을 전해주진 않는다는 거다. 나는 그냥 죄스러울 뿐이었다. 아버지 석상이 왜인지 내게 눈초리를 주고 있는 거 같기도 해서 어깨만 축 늘어진다.
“손바닥하고 무릎이 너무 아파요… 부디 용서를…….”
그렇다곤 해도 알몸 산책이란 말을 내뱉은 이상 실천에 옮길 수밖에 없지 않은가.
노예를 자처하고 있는 이 엘프가 장정 수백 명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짓이겨버릴 괴물이라는 걸 알아차리고 말았으니 최대한 취향을 맞춰줘야 내가 안전하다.
‘저승에 계신 아버지 죄송해요. 제가 가문을 말아먹으려나 봐요….’
언젠가 우리 가문을 말아먹을 호로 새끼가 나올 것 같긴 했는데 그게 나였다니. 눈물이 찔끔 흘러나온다.
인근 숲을 산책하다가 내가 아는 사람을 만나기라도 하면 내 이미지는 나락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중정을 선택한 것이 뒤늦게 후회가 되었다.
“헤엑… 너무 아파앗…!”
그 와중에도 이 개 같은 엘프는 아프지도 않으면서 아프다고 지랄이었다.
마나로 신체를 보호하고 있다는 걸 다 아는데 능청스러움이 창관의 기생 못지않다.
아무리 그래도 계속해서 엘프를 무시할 순 없다. 내가 적절한 반응을 보여주지 않으면 오늘 저녁이 내 제삿날이 될지도 몰랐으니까.
“쓰레기가. 칭얼대지 마라.”
내가 개목걸이의 줄을 홱 잡아당겼다. 켁! 목이 잡아당겨진 엘프가 무릎으로 바닥을 딛고 선다. 허리가 활처럼 휘고 양 손은 자연스레 자신을 속박하는 목걸이를 떼어내려 안간힘이었다. 물론 저것도 다 연기다.
“케헥, 켁…! 죄송… 죄송해여엇…!”
“내가 분명 말했을 텐데? 산책을 하는 동안은 네가 지성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라고. 아니면 뭐지? 네가 대수림의 고귀한 엘프라는 사실이 다시 떠오르기라도 하셨나?”
“아닙, 아닙니다아…!”
“버러지가. 아니라고 하면 봐줄 줄 알았나?”
꽈악. 줄을 잡아당기면서 발을 들어 엘프의 허리를 앞으로 밀었다. 그러자 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면서 엘프의 목을 강하게 조인다.
“끼이… 이익…!”
엘프는 곧 혼절할 것처럼 눈을 반개하고는 침을 줄줄 흘려대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가학증은커녕 식은땀이 흐른다. 이거 대체 언제까지 해야 하지? 좋아하는 거 맞나?
일단 티는 내지 말자.
“명심해라. 네까짓 건방진 종년은 내가 가지고 노는 장난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걸. 망가지면 바꿔버리면 되는 소모품이 네년의 운명이다. 참고로 내가 죽음으로 몰고 간 노예만 해도 이 중정을 꽉 채울 정도다. 알겠나?”
거짓말이다. 이 저택에 엘프 말고 노예가 몇몇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작업장에서 일한다. 진짜배기 노예로 쓰려고 데려온 건 이 엘프가 유일하다.
하지만 내 거짓말이 엘프에게는 어느 정도 통한 것 같았다. 엘프는 간헐적으로 끊기는 숨을 토해내면서 열심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흥. 다음부턴 처신에 주의해라.”
줄을 느슨하게 풀어주자 엘프가 풀밭에 철퍼덕 쓰러진다.
“흐에, 헥…….”
풀밭에 뺨을 기댄 채로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꼴을 보고 있으려니 죄책감이 동한다. 이걸 정말로 좋아하는 게 맞나? 자신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대체 왜 좋아하는 거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해를 해야만 했다. 애초에 잘 살고 있던 대수림에서 뛰쳐나와 노예를 자처하는 미친년이다. 정상적인 사고로 대하면 나만 손해였다.
그래도 이 정도 했으면 이 정신 나간 년도 만족한…….
“헤에, 헥…….”
뭐야. 날 왜 흘겨보는데? 여기서 뭘 더 어쩌라고. 할 만큼 했잖아!
“히윽, 흥…….”
가쁘게 숨을 내쉬면서도 날카로운 눈초리로 나를 올려다본다.
보통…… 주인을 두려워하는 노예들은 주인과 눈을 마주치려고도 하지 않는다. 반면에 이 엘프는 당당하게 내 눈을 마주보고 있었다. 마치 더 필요한 게 있다는 것처럼.
‘내가 뭘 까먹은 게 있나?’
알몸 산책에, 도중에 매도하면서 개목줄로 목까지 졸라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악의 행동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엘프는 전혀 만족스러운 얼굴이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이 엘프는 노예로 들어온 지난 열흘간 가끔이지만 이런 ‘무료한’ 표정을 지어주곤 하였다.
그때는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에서 나오는 치기어린 분노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내 매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가?
“…….”
엘프가 내쉬던 숨을 갈무리한다. 동시에 내 숨도 턱 막히는 느낌이었다.
내가 뭔가 실수를 하고 있다는 게 명확해보였는데 그게 정확히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아무런 행동도 안 했다간…….
─ 제 역할도 제대로 못하네. 건방진 새끼가. 죽여 버릴까.
죽는다! 틀림없이 이 엘프의 손에 죽을 것이다!
엘프를 말리러 온 식솔들도 모두 핏덩이가 되어 바닥을 굴러다닐 게 분명했다. 감시 오브젝트로 봤던, 엘프의 손에 피어오르던 정순한 마나는 분명 그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지금 내게 가문의 존망과 식솔들의 목숨이 달려있다. 침착해야 한다. 침착.
“개, 개년이…….”
목소리를 떨면 안 된다. 내면의 떨림을 진정시킨 내가 목의 브로치를 느슨하게 풀며 말했다.
“몸을 돌려라.”
“네, 넷…?”
“개처럼 배를 까라는 말이다.”
“하, 하지마안….”
“나는 두 번 말하는 걸 싫어한다.”
엘프가 고개를 돌려 주먹을 쥔다. 왜인지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웃음을 참고 있나?’
내막을 알기 전에는 울음을 참고 있다고 느꼈을 테지만, 지금은 아무리 봐도 기뻐하는 것으로밖에 안 보였다. 목숨은 건진 셈이다.
‘다행이다.’
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자, 남몰래 흘리던 웃음을 그친 엘프가 몸을 돌려 강아지처럼 양 손을 들었다.
얼굴엔 홍조가 들고 시선은 나를 마주치지 못한다. 수치심을 느끼는 척 하는 게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일단은 맞춰주기로 하였다.
‘주변에 보는 사람은 없겠지?’
혹시나 회랑의 기둥 뒤에서 이쪽을 지켜보는 식솔이 있다면 낭패다. 내 이미지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게 문제가 아니라, 괴상한 소문이 돌면 가문의 위상이 추락하고 만다.
‘일단은…… 없는 거 같네.’
식솔들은 모두 자고 있는 모양인지 주변은 고요하다. 그렇다면 이제 엘프 노예를 괴롭히는 나쁜 귀족이란 배역에 몰두하면 될 일이었다.
“암캐 주제에 꽤나 좋은 몸을 가지고 있군.”
비열한 미소를 연기하며 엘프의 몸을 훑었다. 당장 이 정신 나간 엘프를 저택 밖으로 내쫓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나였지만, 좋은 몸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한 손으로 잡으면 딱 맞을 정도의 적당히 봉긋한 가슴, 매력적인 굴곡을 이루는 골반과 얼굴을 파묻고 싶을 정도로 매끈한 허벅지, 옅은 분홍빛으로 발색하는 유두와 앙 다물어 일자를 이루고 있는 음부가 남심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달빛을 받아 투명하게 흘러내리는 은발과 어둠속에서 은은한 안광을 흩뿌리는 붉은 눈동자는 고혹적이다 못해 이 세상의 아름다움이 아닌 것으로 느껴진다.
노예시장의 철창 안에서 봤던 모습 그대로다. 내가 이 모습에 홀려 노예상인에게 큰 돈을 쥐어주고 데려왔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악마에 홀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개 같은 새끼.”
분노가 컸던 것일까. 노예상인에게 하려던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잠시 당황했지만 곧 평정심을 되찾았다.
“꼴사나운 모습을 보니 네 년은 엘프가 아니라 천박한 개새끼로 태어났어야 했을 것 같군. 내 말이 틀리나?”
“마, 맞습니다아…….”
“건방진. 개새끼 주제에 사람 말을 하는 건가?”
“엣? 그, 그게…….”
“쯧. 아직도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군. 벌이다.”
내가 발을 들어 엘프의 가슴에 얹었다. 짓누르지는 않았다. 아플 거 같아서…….
“핥아라.”
엘프가 당황하며 나를 올려다본다. 연기가 아니다. 이번엔 진짜 당황한 것 같았다.
‘시발. 선을 넘었나?’
아무리 마조 엘프라고 해도 자기가 정한 선은 있을 터. 그걸 넘어버린 게 아닐까 싶어서 등허리에 오한이 서렸다.
“노, 농담이었─”
턱. 빼려던 발을 엘프가 붙잡는다.
“시, 싫어엇…….”
그러고는 울먹거리며 혀를 내밀었다.
미친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