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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이   따사로운   아침.

시종장   하비드는   식솔들   중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서   중정을   거닐었다.

반듯하게   차려입은   테일   코트와   올백머리,   멋들어진   콧수염과   광택을   머금은   구두는   그의   자랑이자   트레이드   마크였다.

물론   매일   아침마다   구두를   닦고   몸단장을   하는   게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지만,   하비드는   충분히   감내할   수   있었다.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라면   이런   수고로움   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데하름   자작가의   사용인으로서   일해오다   시종장의   자리를   꿰찬   하비드에게   있어서   가문의   명예는   곧   자신의   명예와   같았다.

현   가주인   테오라드를   도와   저택의   사용인들을   통솔하는   시종장의   복식과   품새는   곧   가문의   얼굴.   그러니   귀찮다고   해서   몸단장을   거를   순   없었다.

매일   아침   중정으로   나와   전대   가주의   석상에   참배를   올리는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석상   앞에서   발걸음을   멈춘   하비드가   합장을   하고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곳에서는   부디   평안하시길.   오늘도   드높은   천국에서   저택의   식솔들과   아드님을   보살펴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참배를   마치고   고개를   들려던   하비드는   멈칫하고   말았다.   석상의   주변이   평소와는   다르다는   것을   눈치   채고   만   것이다.

‘석상   발치의   잔디가   누워있다.’

평소   허리를   꼿꼿이   펴고   있던   잔디가   하루   사이에   왜   누워있다는   말인가?   이   저택에는   짐승을   키우지   않으니   개가   그런   것도   아닐   텐데.

‘대체   누가   전대   가주님의   석상에   이리도   가까이   다가갔단   말이냐.’

현   가주님이?   아니다.   테오라드는   항상   석상과   두   발   떨어진   곳에서   참배를   올리곤   하였다.

사용인들?   사용인들은   대부분이   석상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관심을   가진다한들   전대   가주님의   석상에   가까이   다가갈   이유가   없지   않은가.

노예?   노예들은   대부분   저택   밖의   농장이나   작업장에서   일하기에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중정에   발을   들이지   못한다.   당연히   용의자   목록에서   제외였다.

그럼   대체   누구란   말인가.   누운   잔디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하비드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혹여   잔디에   남은   흔적을   찾는다면   범인을   색출하는데   수월할   것   같아서였다.

‘눌린   흔적   말고는   딱히   다른   게   보이지는……   음?’

알싸한   냄새가   코끝을   스치고   지나간다.   무언가의   잔향이   분명하다.   호기심에   동했던   하비드는   잔디를   향해   코를   더   가까이   가져다대었고,   어렵사리   냄새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말았다.

‘……오줌?’

미미하게   남아있는   지린내는   분명   오줌이었다.

‘오줌을   눴다고?   전대   가주님의   석상에?’

이런   천인공노할!   이가   빠득   갈리고   뺨이   부들부들   떨린다.   주먹을   꽉   쥐며   분노하던   하비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누구냐!   구람?   카라신?   말타오?’

머릿속에   평소   태도가   불량한   사용인   셋이   떠올랐지만   확신할   수는   없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사용인들을   집합시켜   윽박을   지르고   싶었으나,   이런   일이   발생했을   때는   가주인   테오라드에게   보고를   올리는   게   먼저였다.

‘두고   봐라.   어떤   녀석이   범인이든지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킨   놈에게   기필코   죗값을   물으리라.   겨우내   분노를   갈무리한   하비드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중정을   나섰다.

*

아치형의   창에서   햇볕이   가득   쏟아지는   집무실.

가문을   상징하는   홍관조가   자수된   검은   융단이   바닥에   깔려있는   이곳은   가주만이   사용할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이다.

아버지의   아들인   나조차   아버지의   허락이   없으면   들어올   수   없던   신성한   장소.   그곳에서   나는   심신을   다스리며   고상하게   편지   한   장을   쓰고   있었다.

『노예상   조빌아라는   보아라.

열하루   전에   그대에게   엘프   노예를   산   테오라드   데하름이라고   한다.

우선   나의   잘못을   사과하마.

그때는   내가   엘프의   용모에   속아   덜컥   대금을   주어   엘프   노예의   주인을   자처하였다.

노예   증서를   받고   각인   계약도   완료하였으니   거래가   성사되었다는   것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허나   조빌아라여.

이것은   명백한   불공정   계약이다.   그대가   나에게   엘프의   나이를   알려주었을지언정   이백   오십   살이   넘은   엘프에   대한   위험성은   알려주지   않았지   않은가?

그것은   나에   대한   기만이며   나아가   신뢰를   기반으로   거래를   하는   노예   시장   전체에   대한   모독이다.

사족이지만   이   사실을   깨닫고   나서   나는   그대가   조실부모한   것이   아닌지   걱정할   정도였네.

그것도   아주   어린   나이에.   그래서   나는   관대한   마음으로   이해하기로   했다.   가정교육을   제대로   못   받았을   테니   실수를   한   번   정도는   할   수   있겠지.

그러나   두   번은   용서치   않겠네.   당장   펠가로인   백작령의   데하름   자작가로   와서   엘프   노예를   환수해주길   바라네.

만약   그대가   내   청을   거절하거나   답장을   하지   않을   시에는   데하름   자작가의   명예를   걸고   그대를   용서하지   않겠네.

자세한   건   얼굴을   대면하며   논하도록   하지.   이만   글줄을   줄이마.

데하름   자작가의   제   7대   가주이자   펠가로인   백작령에서   백작   각하를   보좌하는   부백작   테오라드가   그대에게   발원을   느끼며.』

편지   작성을   마친   내가   깃펜을   내려놓고   잉크가   마르기를   기다렸다.

‘명문이군.’

아랫것에   대한   적절한   협박은   귀족의   기본   소양이다.   이걸   받는다면   노예상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내게   사죄를   하러   올   것이   분명하다.

이후에   엘프를   반품할   수   있게   된다면   금상첨화.   가문에   심어진   시한폭탄을   뿌리   채   도려낼   수   있는   것이니   이보다   좋은   혜안이   없었다.

거기다   엘프한테도   좋은   일이다.   억지로   매도하는   내가   아니라   진심으로   인성이   썩어빠진   귀족을   만난다면   행복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것   아닌가?

이른바   쌍방이익이자   차도살인지계다.

나는   히죽거리는   입   꼬리를   가만히   놔두며   편지지를   접고,   봉투에   넣은   다음   실링   왁스를   붓고   봉인을   찍었다.

가문의   인장이   찍힌   편지라.   이걸   받아본   노예상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걸   보지   못하는   게   한이군.

똑똑─

사악한   미소를   연신   머금고   있는   와중에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헛기침을   내뱉는   것으로   평소의   기품을   유지하며   입을   열었다.

“들어오게.”

내   말이   끝나자마자   문이   열리며   정갈한   풍채의   노인이   들어온다.   예전에는   아버지를   모셨지만   이제는   나를   모시는,   내가   개인적으로   신뢰하는   존재인   시종장   하비드였다.

하비드는   나를   보자마자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예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기침하셨습니까.   오늘은   평소보다   더   일찍   일어나신   것   같습니다.”

일찍   일어난   게   아니라   잠을   못   잔거다.

“간밤에   악몽을   꿔서   말이지.   그런데   시종장이   집무실엔   무슨   일인가?   지금은   식솔들을   관리하고   있을   시간이   아니던가?”

미소를   유지하고   있는   하비드의   얼굴이   죄책감으로   일그러진다.   왜   저러지?   어쩐지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실은……   이른   아침에   천인공노할   사건을   목격하는   바람에   귀빈   접대를   마치고   이리로   바로   올라왔습니다.   가주님께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귀빈?   아니,   그보다   천인공노할   사건이라니?”

“정말   죄송스럽게도……   누군가가   전대   가주님의   석상에   소변을   본   것   같습니다.”

“……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눈이   동그랗게   떠지고   숨이   턱   막혀온다.

뭐,   뭐야.   어떻게   아는   거야?   누가   말해준   건가?   어제   목격자가   있었나?

“놀라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이   제정신   아닌   짓거리를   일찍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석상   발치의   잔디를   유의   깊게   보지   않았으면   아마   범인은   계속해서   소변을   누고   다녔을   테니까요.”

“……석상   발치에   오줌을   눈   흔적이   있었다고?”

“예.   제가   직접   확인했습니다.”

목격자가   있었던   게   아니었구나.   그나마   다행이었다.

나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럼   시종장은   이   일을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나?”

“식솔들   중   범인이   있을   것이   명확하니   범인을   잡아   일벌백계하여   발본색원하심이   옳은   줄로   아옵니다.”

“식솔들   중   범인이   있다고?   그걸   어떻게   확신하지?   짐승일   가능성도   있지   않은가?”

“예?   중정이   망가지는   것을   염려하신   가주님이   저택에   짐승을   키우지   말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가주님의   명령   이후로   저택에는   그   흔한   날짐승조차   키우지   않고   있으니   그럴   가능성은   없습니다.”

시발.   나는   왜   그딴   말을   해서……!

다리가   덜덜   떨리며   손끝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머릿속이   새하얘진다는   감각이   바로   이런   건가.   별로   달갑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는   명문   귀족가의   자제로   태어나   수많은   처세술을   익힌   몸.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다.

“틀린   말은   아니다.”

생각해보자.   누군가가   석상에   오줌을   눴다는   걸   하비드가   알아차렸기는   했지만   목격자는   없지   않은가?   그럼   굳이   조사를   하지   말라는   말로   필요   없는   의심을   살   필요가   없었다.

하비드가   식솔들을   아무리   추궁해도   범인은   찾을   수   없을   테니까.   그래.   여기서는   평소의   나처럼   굴   필요가   있었다.

“아버지의   석상에   오줌을   눈   천하의   쓰레기를   방치할   순   없지.   시종장   자네에게   내   권한을   일부   양도할   테니   범인을   색출하는   것에   힘써주길   바라네.”

“예.   전대   가주님과   현   가주님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기필코   범인을   잡아내고   말겠습니다.”

아니,   잡으면   안   된다고!   그   범인이   나라고!   내가   엘프를   시켜서……!

진정하자.   걸릴   일은   없으니까.

“나를   대신해서   수고해주게.   그리고   이거.”

내가   편지를   들어   내밀었다.   하비드가   가까이   다가와서   공손히   편지를   받는다.

“편지를   부쳐주게.   급한   용무이니   마녀에게   우편을   맡기도록.”

“마녀   일일   특송   말입니까?   알겠습니다.”

편지를   받아든   하비드가   두   걸음   뒤로   물러선다.

하비드는   품속에   편지를   넣다가   문득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저택을   찾아온   귀빈이   누구인지   말씀을   드리지   못했군요.”

아   맞아.   귀빈이   있다고   했었지.

“귀빈이라면?”

“펠가로인   백작가의   둘째   따님이신   에실리   영애십니다.”

“에실리가?”

에실리라면   백작   각하께서   맺어준   소중한   인연이자   나의   약혼자   되는   사람이다.

성정이   온화하고   용모가   단정하며   자애를   베푸는   것을   주저하지   않아서   일각에서는   성인(圣人)이라   불리고   있을   정도였다.

나   또한   에실리에게   무한한   호감을   가지고   있다.   장차   결혼하여   가문을   같이   꾸려가도   되겠다   싶을   정도로   똑   부러진   여자였으니까.

내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다리게   만들어서   미안해지는군.   접대는   잘   하였겠지?”

“예.   최고급   다과를   내오라   명하고   사용인들에게   시중을   맡겼습니다.   다만   영애께서…….”

“다만?”

“엘프   노예가   마음에   든다고   하시여,   현재는   사용인   대신   엘프가   시중을   맡고   있습니다.”

어……?

사고가   마비된다.   왜?   왜   하필   엘프가   시중을   들고   있다는   말인가?

누구에게나   자상한   성정은   분명   칭송받아   마땅한   것이었지만   엘프에게는   아니다.   그   가증스러운   악마는   자신에게   행해지는   모든   친절을   모욕으로   받아들이는   미친년이   아니던가.

엘프에게   친절은   독이었다.   만에   하나의   경우지만,   엘프가   에실리의   계속되는   친절에   싫증을   느낀다면…….

“죽어.”

“예?”

“죽는다고……!”

내가   식은땀을   흘리며   덜덜   떨고   있자   하비드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농담이   과하십니다.   에실리   영애께서는   노예를   거칠게   다루시는   분이   아니라는   걸   잘   아시지   않습니까.   실없는   소리는   그만하시고   가주님께서도   내려가서   다과   파티를   즐기시는   게   어떠신지요.”

시발!   모르면   닥치고   있으라고!   자칫   잘못하다가는   다과   파티가   아니라   시체   파티가   된다고!   시체가   복사된다고   이   순진한   작자야!

“크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시종장이   믿어줄   리가   없었다.   나라도   안   믿는다.   노예로   사온   엘프가   실은   대마법사의   경지에   이른   강자라니.   터무니없지   않은가.

엘프가   이백   오십살이라는   건   저택에서   나만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니   더더욱   그렇다.

말해주고   싶어서   목구멍이   근질거렸지만,   이걸   식솔들에게   알렸다가는   혼란만   야기할   뿐이었다.   더구나   엘프가   나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응접실로   가도록   하지.”

역시.   최악의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내가   직접   엘프를   막아서는   수밖에   없었다.

투기장에   나서는   검사의   심정이   이럴까.   나는   속으로   절규하며   방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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