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들의 말씀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무언가를 선택하려면, 다른 무언가를 포기해야 한다고.
그러니 나는 과감히 결단을 내렸다. 내 목숨이 위험에 처할지언정 에실리에 대한 내 진심을 덮어둘 수는 없었으니까.
이것이 올바른 선택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후회되는 선택은 아닐 것이다.
덜컹─
마차가 한차례 뒤흔들리더니 천천히 정지한다.
잠시 기다리고 있자 마부가 문을 열어주었다.
“섭정 나으리. 도착했습니다요.”
“고맙네.”
가벼운 눈짓으로 고마움을 표현한 내가 마차에서 내려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테일 코트를 번듯하게 차려입은 사내가 내게로 부리나케 달려온다. 별채 파티의 도우미를 맡은 펠가로인의 사용인으로 보였다.
사용인은 내 앞까지 다가와서는 예스럽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섭정 각하. 오셨습니까.”
“그래. 내가 너무 일찍 온 건 아닌가 걱정되는군.”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별채의 홀에 모여계시니까요. 섭정 각하의 마차가 정문에 들어서는 것을 보고 에실리 영애께도 말을 전해놨으니 곧 내려오실 겁니다.”
“부단하게 바쁜 일 사이에서 수고해주어 고맙네.”
“아닙니다. 제가 응당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니까요. 그보다 짐이 있으시면 제게 주십시오. 별채까지 안내하겠습니다.”
외투를 따로 하나 가져오기는 했지만 짐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었다.
“괜찮네. 이 정도는 내가 직접 들고 가지. 별채와의 거리가 그리 먼 것도 아닌데 괜히 자네에게 실례를 끼치고 싶지는 않아.”
“아. 듣던 대로 자상하시군요. 그럼 주제넘지만 별채까지 말동무라도 되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별채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으시다면 언제든 질문을 주십시오.”
“그러지. 가세나.”
내가 발걸음을 옮기자 사용인이 옆으로 따라붙는다. 길을 따라 걸으니 풀벌레가 노래하는 소리가 고즈넉하게 들려온다.
‘이게 바로 자유지.’
오늘 하루만은 엘프에게서 벗어나서 즐거운 생활을 보낼 수 있으리라. 저도 모르게 콧노래가 흘러나오려는데, 사용인이 미심쩍은 듯 나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섭정 각하.”
“응? 말하게.”
“왜 노예를 먼저 보내셨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노예라니? 뭔가 착각하는 것 같군. 나는 별채에 노예를 보낸 적이 없네. 내 노예가 별채에 있을 리가…….”
있었다.
“엗.”
당혹스러움에 혀를 깨문 내가 급하게 입을 틀어막았다.
어찌된 영문인지 별채의 입구에서, 앞치마에 홍차와 흙먼지를 묻히고 있는 엘프가 싸늘한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공포로 뒤덮인 의식 속에서 의문이 자그맣게 꼬리를 들었다.
저 엘프가 대체 어떻게 이곳에 있는 것인가.
‘분명 성 앞에서 엘프를 버리고 달렸었는데…….’
아니. 돌이켜 생각해보면 엘프는 대마법사의 경지에 이른 초인적인 존재였다.
마음만 먹는다면 가까운 거리를 도약하는 것쯤은 손쉽게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생각이 짧았던 내 패착이었다. 에실리를 위한다는 마음이 도리어 에실리를 위험에 빠트리고 만 것이다.
‘망할.’
여기서 내가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크게 두 가지다. 엘프를 데리고 무도회에 입장하여 위험을 감수하거나, 엘프를 데리고 이 자리를 뜨는 것으로 나 하나만 고통받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그 누구라도 후자를 선택할 것이다. 나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기에 침착하게 입을 틀어막은 손을 내렸다.
“미안하지만 갑자기 급한 용무가 생각났네.”
“……섭정 각하?”
“그래서 이만 가봐야겠어. 환영회는 나 없이 진행하도록 하게.”
“하지만, 이리 돌아가시면 에실리 영애께서 실망하실 겁니다. 파티에 참여한 다른 분들에게도 실례가 될 거고요.”
“자네의 말이 틀리진 않으나 나는 지금 급히 돌아가 봐야 해. 그렇지 않으면 대참사가-”
“주인님!”
낭랑한 목소리에 등골이 서늘해진다.
삐그덕.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억지로 고개를 돌리자 엘프가 울먹거리며 내게로 뛰어오는 게 보였다.
‘오지 마. 제발.’
속으로 축객령을 내려봤지만 그게 통할 리가 없었다.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온 엘프가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자신의 가슴 앞에 양손을 올렸다. 탐스러운 가슴이 자연스레 눌려진다.
“주인님이 다과를 대령해서 별채로 오라고 했는데, 제가 칠칠치 못해서 오다가 쏟아버렸어요. 죄송해요 주인님…….”
겁먹은 표정이 일품이다. 내 옆의 사용인은 엘프의 연기를 진심으로 받아들인 모양인지 안타까운 시선으로 엘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보다 엘프가 이리도 천연덕스럽게 구는 저의가 무엇인가. 이유를 알 수 없음에 내가 말을 삼가고 있으니 엘프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별채 안에서는 실수하지 않을 테니까요…….”
쭈뼛거리는 몸짓에서 묘한 위압감이 뿜어져 나온다.
‘그런가.’
이 엘프는 내가 자신을 데리고 별채에 입장하길 바라고 있었다. 내가 자신을 버리고 간 것에 대한 복수인지 원래부터 이럴 계획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제 나한테 남은 선택지는 없다. 나는 속으로 눈물을 삼키면서 엘프를 지나쳐 걸었다.
“쓰레기가. 별채 안에서까지 실수를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
“네에…….”
주눅 든 어투로 대답한 엘프가 내 뒤를 따라온다. 사용인 또한 잠시 머뭇거리다가 내 옆을 따라 걸었다. 내 눈치를 보던 사용인이 슬그머니 말을 건넨다.
“섭정 각하. 노예의 옷이 더러워졌는데 갈아입히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럴 필요 없다.”
옷을 갈아입히라는 명목으로 내 곁을 떠나게 만들면 무슨 일이 발생할지 모른다. 당장의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최악의 사태를 부를 순 없다. 우선은 내 곁에 두는 편이 가장 안전하였다.
사용인은 그런 나를 다소 의아하게 바라보았지만 굳이 이유를 묻진 않았다.
그리 별채의 입구까지 나아가자 사용인이 커다란 문을 열며 우렁차게 소리쳤다.
“데하름 자작가의 7대 당주이자 백작 각하께서 신임하시는, 테오라드 섭정 각하께서 지고하신 몸을 이끌고 별채에 입장하십니다!”
목소리가 워낙 커서 확성 마법이라도 쓴 줄 알았다.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내가 엘프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자 무도회에 모여있던 귀족들의 시선이 내게로 쏠린다.
산해진미가 깔려있는 장탁자 앞에서 음식과 디저트를 집어먹던 미식가들의 손이 멈추고, 부채를 펼친 채 하하호호 이야기를 나두던 귀부인들의 수다가 잦아들며, 세상이 나아가야 할 올바른 길에 대해 탁상공론을 펼치던 학자들의 지식경쟁이 잠시 침묵의 시간을 가진다.
하나 고요는 짧았고, 그들은 다시 융성하게 이야기를 꽃피우며 별채의 파티를 즐기기 시작했다. 몇몇은 내게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주었기에 나 또한 어색한 미소로 화답하였다.
‘거북하네.’
가면을 쓰고 가식을 행해야 하는 이런 자리가 그리 달갑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래도 펠가로인 백작가에서 나를 위해 만든 자리라는데 싫은 티를 낼 순 없었다.
거기다 지금 내 옆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엘프가 있었기 때문에 처신에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최대한 다른 사람과 접촉하지 않고 조용히 있다가 나가는 게…….
“테오라드!”
걸걸한 목소리에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떡두꺼비를 닮은 인상에 풍만한 몸과 사치스러운 옷을 보아하니 펠가로인의 삼남인 맬던이었다. 내가 예를 표하며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입니다. 맬던 공자님.”
“그래. 백작령의 변방에서 이곳까지 오느라 고생이 많았네. 헌데 옆에 있는 노예는 처음 보는군.”
맬던이 입맛을 다시며 엘프를 훑어본다. 그 시선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엘프의 주변으로 정제된 마나가 실오라기처럼 피어올랐다.
‘시발……!’
명백하다. 엘프는 취향이 아닌 걸 넘어서 맬던을 혐오하고 있었다. 음흉한 시선으로 자신의 몸을 훑어보고 있으니 이해는 간다만, 마나까지 끌어올릴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 뾰족한 귀. 엘프인가? 엘프 노예는 또 처음 보는군. 흐음. 가슴도 크고 골반도 매력적이야. 임신하면 아이를 잘 낳겠어. 물론 너 같이 천박한 노예가 귀족의 아이를 가질 순 없겠지만 말이다.”
그만하라고 미친 새끼야! 너 뒤진다고! 너만 뒤지는 게 아니라 무도회에 있는 사람 다 죽는 수가 있다고!
속으로 비명을 지른 내가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며 입매를 끌어올렸다.
“맬던 공자님. 노예 이야기는 그만하고 다른 건설적인 주제에 대해 논의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내게 있어서는 이게 건설적인 이야기야. 그러지 말고 좀 비켜보게. 자네 노예의 가슴이 얼마나 큰지 내가 직접 만져봄으로서 알아봐야겠으니.”
맬던의 짧고 두툼한 손이 엘프를 향해 뻗어나간다. 더 이상 보고 있을 수 없는 관계로, 내가 급하게 손을 들어 맬던의 손목을 붙잡았다.
“응? 지금…….”
손목이 붙잡힌 맬던이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돌아보았다.
“내 행동을 제지한 건가? 자네가?”
“그렇습니다.”
“왜지?”
너 죽을까봐 구해준 거라고 병신아!
“이 노예는 공자님의 소유가 아니니까요. 주인의 허락을 받지 않고 노예를 만지는 것은 예의가 아닙니다.”
“하. 예의? 자네가 나한테 예의를 따질 위치던가?”
“맬던 공자. 말을 조심하십시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내가 두 눈을 사납게 좁히며 맬던을 노려보았다.
“저는 백작 각하의 대리이자 섭정으로서 이 자리에 있는 겁니다. 지위를 논하려거든 자신이 처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도록 하십시오.”
“뭐? 이놈이……!”
맬던이 홧김에 손을 빼려했으나 나는 놔주지 않았다. 몇 번이나 팔을 움찔거리던 맬던이 분한 것처럼 이를 빠뜩 갈았다.
“놔라.”
“제 노예에게 손대지 않으신다고 맹세하신다면.”
“……그리 할 터이니 놓으란 말이다!”
내가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손목을 놔주었다. 맬던은 자신의 손목을 움켜쥐더니 나를 표독스럽게 쳐다보며 무어라 중얼거리다가 홱 지나쳤다.
동시에 엘프의 몸에서 발산되던 마나의 기운이 가라앉는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옷깃을 다듬으니 엘프가 감동어린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죄송해요 주인님. 저 때문에…….”
“닥쳐라. 네 년이 주제를 모르고 내 옆에 달라붙어 있기에 시비가 걸리는 것 아니더냐.”
“히이잉…….”
“흥. 꼴도 보기 싫으니 썩 꺼져라.”
내가 차갑게 내려다보자 엘프는 주춤 뒷걸음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를 떼어놓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나는 낮게 한숨을 내쉬며 홀의 중앙으로 걸어가다가, 익숙한 외형의 여인을 보고서 우두커니 멈추고 말았다.
‘에실리?’
비단처럼 아름다운 금발과 푸른 눈동자가 내 시선을 잡아끈다. 허벅지 쪽이 살짝 트인 드레스와 고풍스러운 장신구를 착용하고 있는 모습은 평소의 수수한 모습과 달라서 더욱 매혹적으로 비춰졌다.
홀린 것처럼 쳐다보고 있으니 에실리가 성큼성큼 다가와서 나를 마뜩잖게 쳐다보았다. 손에는 와인잔이 하나 들려있었다.
“테오라드 경. 대체 무슨 낯짝으로 무도회에 온 건가요?”
무슨 소리야 이건.
“이 무도회는 나를 위한 환영회이지 않은가. 오지 않을 이유가…….”
“뻔뻔하네요. 오라고 한다고 진짜 오다니. 농담이랑 진담도 구별하지 못하는 건가요?”
“에실리. 나는 그저…….”
“할 말이 있으시다면 앉아서 하죠. 오래 서 있었더니 다리가 아파서.”
표표한 기운을 흩뿌린 에실리가 창가의 테이블로 가서 앉았다. 잠시 얼떨떨하게 굳어있던 나 또한 에실리를 따라 테이블의 반대편에 착석하였다.
의자에 앉아 고개를 들자 에실리의 뒤편, 별채의 입구 쪽에서 이쪽을 지켜보고 있는 엘프가 보였다.
“테오라드 경. 당신이란 남자가 얼마나 형편없는 존재인지 알고는 있어요?”
왜 이렇게 심한 말을 하는 거야. 마음이 무너질 것만 같아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자, 에실리가 남모르게 드레스의 치맛자락을 들췄다.
“뭐하는…….”
내가 기겁하자 에실리가 검지를 입에 대고 나를 응시하였다. 조용히 하라는 뜻으로 보여 고개를 끄덕인 내가 천천히 아래를 살폈다. 드러난 에실리의 허벅지에는 끈으로 고정된 종이들이 둘둘 말려져 있었다.
에실리는 자연스러운 손놀림으로 종이를 빼낸 다음 첫 페이지를 내게 펼쳤다. 펼쳐진 종이에는 유려한 필체로 글씨가 적혀있었다.
[테오라드. 저는 당신을 믿고 싶어요. 그래서 청력이 좋은 엘프가 들을 수 없게끔 여기에 질문을 만들어왔어요.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이 아닌 이 종이에 적힌 질문에 대답해주세요. 할 수 있겠어요?]
아. 이래서 나를 매도하는 척 하면서 엘프를 등지고 앉았구나. 엘프의 의심을 죽인 후에 이걸 보지 못하게 하려고. 에실리의 계획을 파악한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침묵하지 말고 말해봐요. 당신이 형편없는 존재라는 걸 알고 있냐니까요?”
에실리가 다음 종이를 펼쳤다.
[혹시 엘프에게 감시당하고 있나요? 테오라드 경은 저는 물론이고 남들에게도 말하지 못할 비밀을 혼자 짊어지고 계신 건가요?]
“그렇네.”
“바보 같은……. 당신은 쓰레기에요.”
다시 종이를 펼친다.
[엘프가 스물다섯 살이라는 말은 거짓이었던 거죠? 그때도 엘프의 눈치를 살피느라 제 앞에서 패악을 부린 것이었고요.]
“그런 셈이지.”
내 대답을 들은 에실리가 한동안 멍한 표정을 지었다. 예측이 맞아들어간 것에 기뻐할 만도 할 텐데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단지 내가 겪었을 고통을 헤아리며, 여태 수많은 착각으로 인해 고통받았을 나를 동정하고 있었다. 에실리는 떨리는 손으로 마지막 종이를 펼쳤다.
[역시. 당신은 제가 알던 테오라드가 맞군요.]
그러나 엘프의 의심을 줄이기 위한 매도는 계속 행해야 한다. 그 사실에 에실리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어렵사리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정말…… 돼먹지 못한 사람이에요.”
죄책감과 미안함이 한데 얼룩진 미소가, 창가의 달빛을 받아 형형하게 빛난다.
덕분에 나는 울컥하는 감정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내 행동에 의심을 품고 이해하려 한 사람이 있다는 것에, 그것이 에실리라는 점에 더없는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티를 낼 수는 없는 관계로.
“잘 보았다.”
나 또한 에실리를 마주보며 짓궂은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흐, 흠!”
상황 파악을 끝마친 에실리가 헛기침을 내뱉은 후 펼쳐놓은 종이들을 갈무리하여 자신의 허벅지에 도로 끼워 넣었다. 이른바 증거인멸이다.
이후로 나와 에실리 사이에 짧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완벽하게 이해하였다는 것은 축복받아 마땅한 일이었으나, 지금은 그 사실을 겉으로 드러낼 수 있을 정도로 평탄한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엘프가 이쪽을 지켜보고 있다. 그 사실에 대한 부담감을 이제 나뿐만이 아니라 에실리도 함께 짊어지게 된 것이다.
“테오라드 경. 수치스러운 짓을 했으면 가문을 대표해서 어떻게든 사과를…….”
계속되는 침묵은 의심을 받는다. 어떻게든 말을 이어나가던 에실리가 테이블을 툭툭 소리나게 두드렸다.
시선은 구석에 자리를 잡은 악단을 향한 채였다. 무슨 일인가 싶어 돌아보자 연미복을 잘 차려입고 있는 악단이 에실리의 신호를 받고 급하게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평소보다 좀 더 시끄럽게, 잔잔하지만은 않은 선율들이 무도회의 홀을 꽉 채운다.
“에실리. 설마…….”
쉿. 에실리가 검지를 들어 다시금 내게 주의를 주었다. 아직은 말하면 안 돼요. 작게 입술까지 달싹이면서.
─ 자아! 고매하신 신사 숙녀 여러분!
파티의 진행을 맡은 사용인이 확성 마법을 이용하여 목청을 높였다. 홀의 귀족들은 익숙한 것처럼 서로 짝을 지으며 즐거운 미소를 흘렸다.
─ 파티의 대미를 장식할 시간입니다! 서로 손을 맞잡고 홀의 중앙으로 모여주시길! 빛의 신이 축복하는 밤하늘 아래에서 여러분들의 우아한 몸짓을 자랑해보십시오!
사용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귀족들이 삼삼오오 짝을 이룬 채 홀의 중앙으로 걸음을 옮겼다. 흐름을 타는 것처럼 악단의 연주소리는 점점 높아져갔다.
그 모습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으니 에실리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테오라드 경. 저를 거칠게 끌고 가세요. 기분이 상한 것처럼요.”
“내가 어찌 너를 거칠게 대한단 말이냐.”
“상냥한 말씀이지만 지금은 덮어두세요. 엘프의 의심을 피하는 게 먼저잖아요?”
확실히. 엘프는 아직도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뭔가 미심쩍다는 것처럼.
여기서 내가 미적지근하게 군다면 에실리가 열심히 준비한 계획들이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고개를 끄덕인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에실리의 팔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꺅─!”
비명을 내지른 에실리가 넘어질 듯 말 듯 끌려와서 내 품에 안겼다. 가슴의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지만 지금은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니다.
내가 에실리의 귓가에 대고 중얼거렸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되나?”
“……혹시 모르니 엘프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요. 그런데 테오라드 경. 이렇게 세게 잡아당기라는 소리는 아니었어요.”
“문제라도 있나?”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 에실리는 우물쭈물 말을 삼킬 뿐이었다.
아무튼 가만히 있을 필요는 없었다. 나는 에실리를 이끌고 엘프에게서 최대한 먼 곳으로 걸어갔다. 그렇게 홀의 구석진 자리까지 간 다음에야 걸음을 멈추고 에실리를 돌아보았다.
“이제…….”
“춤을 춰요.”
춤? 이야기를 나누고자 이곳으로 온 게 아니었나? 잠시 멍하니 있던 나는 주변의 풍경을 보곤 이해하였다.
“그렇군. 다들 춤을 추고 있는데 우리만 멀뚱히 서 있으면 의심을 받겠어.”
“그게 아니에요.”
“응?”
“저는 그냥 테오라드 경하고 춤을 춰보고 싶었어요. 평소엔 독서밖에 안 하시고 정적인 취미만 즐기시잖아요. 무도회에 나오신 것도 거의 삼 년 만이죠?”
에실리가 내 왼팔을 붙잡고 오른손을 잡아 깍지를 꼈다. 입가에 걸리는 부드러운 미소가 쑥스러우면서도 고상하다.
“그러니까 조금만 즐기도록 해요, 우리.”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싫다고 할 수도 없었다. 내가 얄팍한 미소를 지으며 에실리의 등을 껴안았다.
“그러지.”
경쾌한 음악이 고조되면서 에실리와 나의 발이 한 몸처럼 움직인다. 그러나 이따금 발이 꼬여서 헛발질을 하면, 에실리가 작게 키득거리며 내 몸짓을 교정해주었다.
배웠으나 즐기지는 못했던 원무(圆舞)가 에실리를 만나 꽃이 되었다. 행복한 향기가 내계(内界)로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테오라드 경.”
그러나 오래갈 수 없는 행복이다. 춤을 추는 와중에 에실리가 표정을 달리하여 내게만 들릴 정도로 속삭였다.
“이제 말해주세요. 엘프가 정확히 몇 살인지.”
“아. 내가 알기로는 이백오십 살이네. 마법적 능력도 대마법사와 견줄 정도고.”
“그렇군요…….”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는 것처럼 반응이 초연하다. 에실리는 박자에 맞춰 발을 움직이며 재차 질문했다.
“그 외에 더 아는 정보는 없으신가요? 엘프가 노예 연기를 하는 이유라던가?”
“성정이 변태적이야. 그것 외에는 아직 아는 게 없네.”
“흠. 글쎄요. 제가 보기에는…… 아무래도 일반적인 엘프가 아니에요.”
“일반적인 엘프가 아니다?”
“그냥 단순한 추측이에요. 이름을 물었을 때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얼버무렸다는 게 마음에 걸려서요. 거기다 오늘 점심에, 저를 바라보는 엘프의 시선에서 묘한 적개심이 보였어요. 이게 과연 단순한 독점욕일까요?”
한 바퀴 돌아, 나와 에실리의 자리가 바뀐다.
“하고 싶은 말이 뭔가?”
“그냥. 엘프가 테오라드 경에게 우연히 팔려온 게 아닐 것 같다는 거예요.”
당황스럽다.
“나로서는 모르는 일이다. 엘프의 정체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는 정황이 아무것도 없어.”
“저 또한 마찬가지에요. 그럼 일단은 제가 대수림에 관련해서 정보를 찾아볼게요. 베일에 싸여있는 공간이라 알 수 있는 게 많지는 않겠지만,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으니까요.”
“말뿐이라도 고맙네.”
“말뿐만이 아닌걸요.”
장난스럽게 웃어 보인 에실리가 입구 쪽을 힐끔 살펴본다. 엘프는 여전히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쨌건 엘프가 화가 많이 난 모양이에요. 테오라드 경이 다른 여자랑 즐겁게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이 좋게 보이지 않은 걸까요?”
“그걸 어떻게 아나?”
“여자의 감이에요. 아무튼 이대로 가다간 테오라드 경이 엘프에게 꽤나 시달리실 거 같네요. 최악의 경우 엘프가 테오라드 경을 데리고 대수림으로 가버릴지도…….”
내가 헛숨을 들이키며 에실리의 손을 꽉 붙잡았다.
“그래서는 안 된다! 내게는 가문을 지켜야 할 사명이 있단 말이다……!”
“지, 진정해요. 어디까지나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거니까. 피해나갈 방법은 분명 있어요.”
“방법?”
“네. 테오라드 경에게 불리한 방법이긴 하지만요.”
“상관없다. 엘프의 화를 누그러뜨릴 수만 있다면.”
“그럼…… 조금 아플 거예요.”
아파? 무슨 소리인가 싶었던 순간, 에실리가 깍지 낀 손을 빼서 내 뺨을 향해 휘둘렀다.
짝─!
턱이 돌아가고 시야가 점멸한다. 악단의 연주가 멈추고 춤추던 귀족들이 멈칫하며 이쪽을 돌아보았다. 내가 당혹스러움 속에서 고개를 돌리니 에실리가 열심히 입을 벙긋거렸다.
싸 운 것 처 럼
아. 사이가 틀어진 연기를 해서 엘프의 화를 죽이자는 소리였구나. 더해 모두가 보는 앞에서 폭력을 행했기에 엘프가 이걸 연기라고 의심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납득한 내가 헛기침을 내뱉고는 옷깃을 단정하게 다듬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싸운 것처럼 보이는 거지?’
에실리와는 단 한 번도 싸워본 적이 없었다. 딱히 에실리가 아니더라도 나는 살면서 폭언이 오갈 정도의 다툼을 벌인 적이 없다.
그렇다고 대충 넘어가기에는 이곳을 지켜보고 있는 눈들이 너무 많았다. 거기다 엘프를 속여야 하지 않는가.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 급하게 에실리의 턱을 붙잡았다.
“앙칼진 것아.”
에실리의 턱을 내 쪽으로 끌어당기며, 고개를 슬며시 숙여 눈높이를 맞추었다.
“언젠가 내 것으로 만들어주마.”
에실리의 두 눈이 동그랗게 뜨인다. 뺨에는 홍조가 들고 입은 멍하니 벌어졌다.
에실리도 연기를 하는 것이리라. 나는 무슨 의미인지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인 후 에실리의 턱을 놔주고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기다리고 있던 엘프가 자연히 내 쪽으로 달려와서 팔에 엉겨 붙었다. 부드러운 두 가슴이 내 팔을 감싸고 도는 게 묘하게 신경이 쓰였다.
“주인니임. 괜찮으세요?”
나를 걱정하는 붉은 눈동자에 만족스러운 기운이 서린다. 덕분에 안도감이 들어 온몸의 기운이 쭉 빠지는 느낌이다.
“주제넘게 걱정하지 마라.”
“히잉……. 괜찮으시면 제 가슴이라도 만지실래요 주인님?”
“필요 없으니 꺼져라.”
재차 눈치를 주니 엘프가 우물쭈물하며 내게서 멀어진다. 노골적으로 혀를 찬 내가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에실리가 당연한 것처럼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부탁할게.’
뒤처리는 에실리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 나는 가볍게 목례한 다음 별채를 빠져나갔다.
*
한편, 에실리는 별채의 입구를 멍한 눈으로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이 진정되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앙칼진 것이라고……?’
연기라는 걸 안다. 하지만 알아도 어찌할 수 없는 게 인간의 감정이었다. 괜히 얼굴이 새빨개지고 호흡이 들뜬다.
그 모습을 의아하게 여긴 귀족들 중 한 명이 에실리의 어깨를 가볍게 붙잡았다.
“에실리 영애. 대체 무슨 일이기에 테오라드 자작을 후려친 거요?”
“엡, 네, 넷?”
얼빠진 소리를 흘린 에실리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아, 음. 갑자기 입을 맞추시려 하기에 무심코 놀라서…… 다른 이유는 없어요.”
“허. 입을 맞추려했다고 뺨을 때렸단 말이오? 약혼한 사이면서?”
“맞아요. 제가 바보처럼 굴었어요. 그러면 안 되는 건데…….”
멋쩍게 있던 귀족이 곧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에실리의 수줍은 자태를 보고 방금 일어난 사건을 ‘철없는 젊은이들의 사랑싸움’정도로 치부한 것이다.
“내참. 별 것도 아닌 걸로 싸우시는구려. 젊음의 패기라 이건가. 아무튼 악단은 연주를 계속하게! 파티의 주역이 갔다지만 이대로 무도회를 망칠 수는 없지 않은가!”
귀족이 손뼉을 짝짝 치자 악단이 연주를 개시하였다. 경쾌한 선율이 흐르는 와중에 꺄아─ 꺄─ 호들갑을 떨면서 저들끼리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귀부인들과 젊은 영애들이 보였다.
괜히 낯부끄러워서 시선을 둘 데가 없다.
“저, 저는 이만 가볼게요.”
주변의 귀족들에게 양해를 구한 에실리는 춤과 수다가 범람하는 무도회를 떠나 별채의 특실에 도착하였다.
문을 닫고 앞으로 걸어간 에실리는 침대에 털썩 걸터앉은 후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러나 마음이 조금 진정되려고 하면 느닷없이 테오라드의 말소리가 머릿속에 재생되었다.
─ 앙칼진 것아. 언젠가 내 것으로 만들어주마.
테오라드의 입에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말. 그렇기에 더 충격적이고 자극적이었다.
에실리는 조금 전 테오라드의 모습을 기억한다. 가을 밀밭과 같은 연갈색 눈동자를 날카롭게 좁히며 자신을 그윽하게 응시하던 눈동자와, 살며시 비틀린 입매에서 흘러나온 차가운 어투를.
평소의 자상하고 선량한 테오라드에게는 절대 볼 수 없는 면모였다. 괜히 얼굴이 화끈거리고 입술이 바짝바짝 마른다.
“바보…….”
화를 내라고 했더니 유혹을 하면 어쩌자는 말인가.
─ 언젠가 내 것으로 만들어주마.
또 다시 재생되는 목소리. 그러나 그게 그렇게 싫지는 않았다.
에실리는 근처에 있는 베개를 들어, 품에 꼭 안으며 얼굴을 붉혔다.
“바보 테오라드.”
오늘은 어쩐지 쉽게 잠들지 못할 것 같았다.
다음날 정오.
백작령을 비추는 태양은 맑았다. 마치 이곳에는 어둠이 없다고 일컫는 것처럼.
적잖게 떠다니는 구름들도 오늘은 이상하리만치 태양을 비껴나간다.
성벽로 위에서 망양한 하늘을 느긋하게 감상하던 프레드가 눈이 따가운 듯 시선을 내렸다.
‘펠가로인 백작령.’
수많은 집과 화려한 건축물들이 랜드마크 역할을 수행하는 광장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뻗어나가 있었다. 프레드는 그 모습을 가만히 조감(鸟瞰)하였다.
길고 멀다. 광막하며 계획적이다. 오랜 세월동안 펠가로인 백작가가 구축해온 영지는 이제 ‘작은 나라’라고 불려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였다.
제국의 중부에 무엇이 있냐고 물으면 변방의 어린아이조차 가장 먼저 펠가로인 백작령을 떠올릴 정도였으니 가문의 위상이야 두 말하면 입이 아플 정도였다.
그러나 프레드는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의 가문이 제국에 속해 있으며, 가문이 대대로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드는 군신의 관계를 가져왔다는 것이 짜증날 정도로 싫었다.
형님인 베넬러가, 착해빠진 겁쟁이가 황제 폐하의 명령에 내몰려 정벌군의 선봉을 자처하다가 비참하게 죽은 이후로는 더더욱.
‘벌써 팔 년 전인가.’
형님의 죽음에 슬퍼하며 목 놓아 울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시간이 많이도 흐른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프레드는 그때의 증오와 슬픔을 단 한 순간도 잊지 못하였다.
가문을 위해 증오를 희석시키고 슬픔을 떨쳐낸 에실리에 비하면 참으로 철없고도 어리석은 면모였으나, 태어나길 이리 태어났는데 어쩌란 말인가.
애초에 황제 폐하께서 형님께 부당한 명령을 내리지 않았으면…….
“프레드 공자님.”
뒤편에서 들려오는 따스한 미성이 상념을 깨어지게 만든다. 몸을 돌리자 옷가지를 단정하게 차려입은 테오라드가 살가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저를 보자고 하셨다기에 이리 올라왔습니다. 따로 용무가 있으신지요?”
프레드가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런데 용무(用务)는 아니고 용무(宂务)일세.”
“프레드 공자님?”
“하하. 농일세. 집무를 보고 있는데 이리 따로 불러내어 미안하네. 하지만 좀 이상한 소문을 들어버린 터라. 확인하고픈 마음에 매제를 이렇게 불렀네.”
테오라드의 어깨가 움찔 떨린다. 소문에서 한 번, 확인에서 한 번. 스스로도 어제 일어난 일에 대해서 경각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리라.
“어제 내 여동생이 자네의 뺨을 때렸다더군. 들리는 말에 의하면 강제로 입을 맞추려 했다나. 망측한 소문이라 어제 파티에 참석한 귀빈들께 입단속을 요청하긴 하였으나 이야기가 퍼지는 걸 막지는 못 할 거야.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아. 그것이…….”
말 꼬리를 흐리며 시선을 돌리는 모습이 풋풋하게 느껴진다. 프레드는 미소를 숨기지 않으며 테오라드의 어깨를 감쌌다.
“잘했네.”
“……예?”
“나는 매제가 샌님인줄 알고 조금 걱정했네. 어렸을 때부터 교제해온 사이면서 아직도 입을 맞춘 적이 없다기에 나는 자네가 성욕이 없는 쪽인가에 대해 의심할 정도였단 말일세. 그런데 이번 사건을 보니 그건 아닌 것 같군.”
테오라드가 부자연스럽게 헛기침을 내뱉었다. 본심이 드러난 게 부끄러운가? 의젓하게 굴다가도 이럴 때만 보면 세상 물정 모르는 순박한 청년처럼 보여서 괜히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프레드가 능청스럽게 테오라드의 가슴팍을 툭툭 두드렸다.
“소문이라면 걱정하지 말게. 자네와 에실리의 사랑 놀음에 대부분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으니 말이야. 젊은 영애들 사이에서는 낭만적이라는 말까지 돌고 있을 정도네.”
“아. 그렇습니까…….”
“그래. 그보다 어제 맬던과 무슨 일이 있었나? 맬던 고 놈이 아침 식사자리부터 매제를 비방하더란 말이지. 참다못한 에실리가 눈치를 주지 않았으면 식사 자리가 아니라 비난의 장이 될 뻔 했어.”
맬던이라. 무도회에서 있었던 일을 되짚어보던 테오라드가 다소 불편한 안색으로 대답했다.
“이해하지 못할 바가 아닙니다. 제가 어제 맬던 공자에게 실례를 저질렀으니까요.”
“반대가 아니고?”
어떻게 아는 거지? 테오라드가 의문을 담아 돌아보자 프레드가 어깨를 감싸던 손을 놓았다.
“에실리와 나 사이에서 자주 하는 말이 있거든. 별건 아니고 ‘맬던에게 욕을 먹은 사람은 둘도 없이 착한 사람’이라는 말이네. 내 동생이긴 하지만 그 놈 심정이 고약한 건 다 아는 사실이니. 어디 한 번 말해보게. 역시 맬던이 먼저 자네에게 실수를 범했겠지?”
“……제 노예를 멋대로 손대려고 하시긴 하였습니다.”
“역시. 어쩐지 녀석의 말에 원인은 없고 결과만 가득하더라. 내가 맬던을 대신해서 매제에게 사과하지. 펠가로인 가문의 무례를 용서해주게.”
가문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 테오라드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반추하자면 말보다 행동이 앞선 저의 잘못도 있습니다. 데하름 자작가의 무례를 먼저 용서해주신다면 저 또한 펠가로인의 자그마한 실수를 용납하겠습니다.”
잘잘못이 명확함에도 불구하고 테오라드는 상대의 가문보다 자신의 가문을 낮추는 것으로 서로에게 마땅한 죄가 없음을 표면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과연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 이건가. 처세술이 뛰어나다 못해 먼저 우를 범한 쪽의 기분이 도리어 좋아질 정도였다.
더해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연스레 부채감을 지게 만든다. 의도한 것인지 의도하지 않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도 이상의 명망을 가진 자의 선심은 때론 유용한 무기가 되는 법이다. 테오라드는 그 점을 잘 이용하고 있었다.
“그리 말해주니 고맙네.”
추궁하고 싶었던 것이 몇 개 더 있었지만 대화의 흐름상 꺼낼만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프레드는 입맛을 쩝 다시면서 테오라드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두드렸다.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끝났네. 바쁠 텐데 이만 내려가보게. 섭정 각하의 시간을 소비하게 만들어 미안하네.”
“당치도 않습니다. 프레드 공자님과의 대화는 언제나 유익하니까요. 그럼.”
예스럽게 고개를 숙인 테오라드가 뒤돌아 걸어나갔다. 테오라드의 뒷모습을 한동안 쳐다보던 프레드가 낮게 웃음을 터트리며 몸을 돌렸다.
‘신기한 놈이야.’
테오라드 데하름.
밑도 끝도 없이 착한 것 같으면서도, 녀석에게는 속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
백작 각하의 집무실에 돌아온 내가 목의 브로치를 잡아당기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들키는 줄 알았네.’
에실리와 벌인 모종의 작당이 들통 난 줄 알고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하마터면 프레드까지 엘프의 마수에 끌어들일 뻔하였다.
‘알고 있는 사람이 많아서 좋을 게 없어.’
정보를 공유하다가 노예 연기에 심취하고 있는 엘프의 심기를 건드린다면 그야말로 파멸이었다. 정체가 들통난 엘프는 나를 죽이고, 가문을 박살 낸 후에 새 주인을 찾아 떠나버리겠지.
나는 그런 암울한 미래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니 일단은 에실리와 나만이 정보를 공유하면서 방도를 마련해야 했다.
하지만 그 전에, 백작령에 드리운 어둠부터 걷어내는 편이 맞았다. 나는 집무 책상의 앞에 앉은 다음 마르한이 가져다 준 자료들을 다시금 살펴보았다.
범인들의 인상착의를 그린 몽타주와 범행이 발생한 장소를 표시한 지도, 백작 각하의 사병들과 기사단이 백작령을 돌아다니며 영지민들의 증언을 기록한 문서가 내게 있었다.
하나 놈들의 다음 범행 장소를 특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증언이 겹친다.’
영지민들의 증언에 통일성이 없었다. 예로 방앗간 거리의 21번 구역에서 범인을 목격했다는 증언이 있으면, 같은 시각에 정 반대편에 위치한 갈까마귀 거리의 17번 구역에서 범인을 목격했다는 증언이 있었다.
둘 모두 열 명의 범인 전부를 목격했다고 적혀있었으니 동선을 추적하고 싶어도 그리할 수가 없었다.
‘공범이 있다는 소린데.’
목격자를 자칭하는 영지민들 중 몇몇이 ‘십인의 의적’들에게 협력하고 있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똑똑─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와중에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한숨을 쉰 내가 들었던 깃펜을 내려놓았다.
“들어오게.”
끼이익…….
힘없이 열린 문 너머로 엘프가 보인다. 일순간 섬뜩한 느낌이 들었지만 이제는 꽤나 익숙하다. 내가 말없이 응시하고 있으니 엘프가 쭈뼛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주인니임……. 제가 작은 실수를 저지르는 바람에 자백하러 왔어여…….”
작은 실수? 궁금하기는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꺼져라. 지금 나는 네 년을 훈계할 정도로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니까.”
“아! 자, 잘못 말했어요! 큰 실수라서 지금 당장 혼내주셔야…….”
“멍청한 년. 내 말이 귓등으로도 안 들리는 모양이지? 바쁘다고 하지 않았나.”
엘프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며칠간 그렇다할 매도를 못 당했으니 안달이 난 건 이해하지만 나는 정말로 매도를 해줄 시간이 없었다.
이제 성에 체류할 시간이 얼마 안 남았는데, 그때까지 이 강도 녀석들을 모두 소탕하고 싶었으니까. 그럼으로 백작 각하에게 내 쓸모를 입증하고 싶었다.
“아하. 주인님께서 바쁘시구나…….”
대체 왜 바쁘신 걸까. 작게 중얼거린 엘프가 집무 책상 위에 펼쳐진 몽타주를 훑어본다. 그러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났다.
“그럼 나중에 뵐게요, 주인님.”
의외로 수긍이 빠르네. 의아스럽긴 하지만 내 입장에선 다행이었다. 엘프가 문을 닫고 나가는 걸 확인한 나는 다시금 자료를 탐독하였다.
*
어두운 밤. 몰타르 여관에서 간사한 인상의 사내, 함버가 계단을 올랐다.
‘내게 정보를 얻고 싶다고 했었지.’
노을이 지고 세상이 제법 어스름해졌을 때였다. 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갈 차비를 하는데, 갑자기 로브의 후드를 꾹 눌러쓴 미모의 여성이 다가오더니 ‘십인의 의적’에 관해 아는 게 있냐고 물어왔다.
처음에는 시치미를 뗐으나 집요하게 물어오는 통에 함버는 결국 안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여성은 관련해서 이야기를 나누자며 몰타르 여관에서 기다리겠다고 하였다.
미모의 여성과 단 둘이서 여관방에 있을 수 있다는 음흉한 생각에 함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지금 몰타르 여관에 도착한 것이다.
‘206호 객실이라고 했지.’
복도를 걸으며 현판을 확인한 함버가 206호의 문고리를 붙잡고 돌렸다.
‘열린다!’
기다리겠다는 말은 아무래도 거짓말이 아닌 모양이었다. 이게 웬 횡재야. 속으로 쾌재를 지른 함버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일전에 봤던 여성이 침대에 앉아있었다.
여성은 함버를 확인하고는 매력적인 입술을 달싹였다.
“범인이 어디에 있는지 말해. 다 알아보고 왔으니까.”
다짜고짜 목적부터 말하다니 어이가 없다. 슬그머니 문을 잠근 함버는 혓바닥으로 입술을 핥으며 여성에게 다가갔다.
“이거 왜 이러실까. 정보를 원하시면 대가를 주셔야지.”
“대가?”
“그래. 외모가 꽤나 뛰어나신데, 나랑 하룻밤만 보내주시면 원하는 정보를 드리리다.”
물론 하룻밤을 자준다고 해서 정보를 건넬 생각은 없다. 적당히 강간한 다음 약물을 투여해서 인사불성으로 만들고, 그대로 노예시장에 팔아 목돈을 좀 만질 생각이었다.
“역시.”
그러나 여성은 자신이 위험하다는 걸 모르는지, 초연한 안색으로 후드를 벗었다. 윤기를 머금은 은발 아래로 뾰족한 귀가 드러난다.
“단명종들은 상냥하게 대하면 선을 넘는구나.”
“잠깐만. 너 엘프-”
함버의 몸이 공중에 떠올라 벽에 처박혔다. 쾅! 벽에 처박힌 몸이 튕겨져서 바닥을 구른다. 강렬한 충격에 천장의 잔해가 부스스 떨어지는 와중에 함버가 입을 한껏 벌린 채 신음을 흘렸다.
“꺼, 끄으윽…….”
혼절할 것 같은 정신 속에서 엘프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이 보인다. 뚜벅뚜벅. 거만하게 걸어온 엘프가 함버를 싸늘하게 내려다보며 말문을 열었다.
“범인.”
“저, 저는 모르는…….”
함버의 몸이 공중이 떠올랐다가 광속으로 바닥에 처박힌다. 쿵! 둔탁한 충격음과 함께 온몸의 뼈마디가 박살나는 느낌이었다. 이젠 신음조차 나오지 않아서 게거품을 물고 있으니 엘프가 발을 들어 함버의 머리를 짓밟았다.
“범인.”
그제야 함버는 엘프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엘프는 인간을 생명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죽일 거고, 모른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으면 괘씸하다고 죽일 거다.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알고 있는 정보를 모두 토해내는 것. 함버는 자신의 머리를 짓밟고 있는 엘프에게 극도의 공포감을 느끼며 악을 내질렀다.
“마, 말하겠습니다! 십인의 의적이 어디에 숨어있는지─!”
창밖에서 지저귀는 새소리에 스르르 눈을 떴다. 흐린 눈으로 멍하니 정면을 응시하던 내가 급하게 상체를 일으켜 세우며 입가에 흐른 침을 닦아내었다.
“쓰읍.”
범인을 잡겠답시고 종일 책상 앞에 앉아있었더니 저도 모르게 잠든 모양이었다. 잠든 모습을 본 사람은 없겠지만 괜히 수치심이 동한다.
헛기침을 하고 뺨을 툭툭 두드리는 것으로 정신을 차린 나는 어지럽게 펼쳐진 서류들 사이에서 지도를 한 장 꺼내들었다.
시가지를 이루는 세 지역 중 특별한 구간에 동그라미를 친 지도. 어제 영지민들의 증언을 계속 살펴보며 모순점을 파악한 내가 범인들의 다음 범행 장소를 임의로 특정한 것이다.
이 구간에 꼭 나타난다는 보장은 없지만 확률은 가장 높았다. 문제는 동그라미를 친 구간이 아홉 군데나 된다는 것이다.
‘백작 각하의 사병은 물론이고 기사단의 가용 인원을 모두 투입하면 범인을 잡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겠지만…….’
그랬다가는 자칫 영지민들의 불안감을 키울 것이다. 병사와 기사들의 대규모 이동은 영지 전체에 부담감을 주기에 충분했으니까.
기껏해야 강도 열 명을 잡는 일인데 괜한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는 않았다. 더구나 이만한 규모의 사병과 기사를 투입했는데도 범인을 잡지 못하면 내 평판이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신중해질 필요가 있었다.
‘피해를 입은 귀족들을 찾아가서 이야기를 들어봐야겠어.’
영지민들의 증언만으로는 범위를 더 좁히기 힘들다. 그렇다면 발품을 팔아서라도 제대로 된 목격담을 입수할 필요가 있었다.
‘마르한을 불러서 순찰을 돌자.’
결심을 굳힌 내가 서류를 갈무리하는 와중, 뜬금없이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엘프인가? 혹시나 싶은 마음에 말없이 가만히 있으니 문 너머에서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섭정 각하. 힐데스 프로하임이라 합니다. 바쁘신 와중에 방해를 하여 죄송하지만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힐데스 프로하임.
펠가로인 백작가에서 창설한 푸른 깃발 기사단의 단장이자 황실 공인 검술가 단체 ‘불식(不息)의 매’에서 프로보스트 마이스터 등급을 인정받은 위인이었다.
팔 년 전에 있었던 오크 정벌 전쟁에서는 배너렛 기사로 임명되어 수많은 병력을 지휘하였기에 백작령에서는 힐데스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만큼이나 잔뼈가 굵은 사람이 나를 찾아왔다니까 괜히 긴장이 된다. 나는 목을 한 번 가다듬은 다음 말문을 열었다.
“당연하다. 들어오게.”
내 허락에 문이 열리며 턱수염을 정갈하게 깎은 힐데스가 들어온다. 노련함이 돋보이는 눈주름 아래로 사람 좋은 미소가 걸린다.
평시임에도 불구하고 경갑을 갖춰 입고 있는 모습에서 각 잡힌 기강이 느껴진다. 힐데스는 투구를 옆구리에 낀 채 내게로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고개를 꾸벅 숙였다.
“푸른 깃발 기사단을 대표하여 섭정 각하를 뵙습니다. 인사가 늦어 죄송스럽습니다.”
“이, 이러지 마시게. 강도 사건으로 기사단이 바쁘다는 건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으니. 고개를 들게.”
“관대하신 말씀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섭정 각하.”
힐데스가 고개를 들었다. 입가에는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려있었다.
“이렇게 얼굴을 마주 보는 건 오랜만이군요. 정말 장하게 크셨습니다. 먼저 세상을 떠나신 어르신께서도 지금의 테오라드 공자님을 보신다면 분명 자랑스러워하실 겁니다.”
갑자기 칭찬을 건네오니 괜히 머쓱해진다.
“그 정도는 아니네.”
“겸손하시긴. 제 아랫사람에게 듣기를 섭정 각하께서는 집무실에 들어가신 이후로 방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답니다. 집무에 골몰하시는 모습이 뻔히 보이는데 어찌 장하지 않겠다고 하겠습니까?”
“그……. 혹시 기사단장은 지금 나를 놀리고 있는 것인가?”
섭정으로서 백작 각하의 성에 왔으니 집무에 골몰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당연한 일을 했는데 대견하다고 여기는 것이 내 입장에서는 나를 놀리는 게 아닌가 싶었다.
힐데스는 삐딱한 내 태도에 끌끌 웃고는 투구를 집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의무를 도외시하고 권리만 찾는 귀족들이 널린 판국인지라 섭정 각하 정도면 후한 평가를 받아 마땅합니다. 제 진심을 희롱으로 여기신다면 어쩔 수 없지만 말입니다.”
“날 띄워주는 건 그만하면 됐네. 그런데…….”
힐데스의 흉갑을 훑어본 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흉갑의 언저리에 숲을 뛰어노는 사슴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전문적인 각인 기술을 거친 게 아니라, 송곳 같은 날카로운 것으로 대충 긁어 만든 것 같은 그림이었다.
“흉갑에 그려진 숲은 뭔가? 기사단장이 숲에 관심이 있다고는 못 들어봤는데.”
“아. 이거 말입니까? 어제 수련장 근처에 갑주를 벗고 운동을 하는데, 운동을 끝마치고 갑주를 챙기러 갔더니 섭정 각하의 노예가 제 흉갑에 낙서를 하고 있더군요. 참으로 당돌하지 않습니까?”
힐데스가 껄껄 웃는다. 반대로 나는 당황스러움에 헛숨을 들이켰다. 엘프가 어제 말한 ‘작은 실수’가 설마 펠가로인 백작가의 기사단장 흉갑에 낙서를 한 것인가?
‘애초에 실수가 아니잖아!’
이거 누가 봐도 고의잖아 이 미친년아! 식은땀을 흘리던 내가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힐데스에게 고개를 푹 숙였다.
“미, 미안하네! 내가 노예 관리를 잘못한 탓일세!”
“섭정 각하? 사과를 하실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하지만 내 잘못이야! 책임지고 배상을 해줄 터이니 데하름 자작가에 피해액을 청구하게!”
“저, 각하께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는 잘 알겠으나 저는 이게 꽤나 마음에 듭니다.”
어? 마음에 든다고? 의아함에 고개를 들자 힐데스가 진지한 낯으로 흉갑의 그림을 툭툭 두드렸다.
“잘 그렸지 않습니까? 숲은 금방이라도 불어오는 바람에 가지가 휘날릴 것 같고 뛰어노는 사슴은 역동성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종이에 그린 것도 아니고, 굴곡진 흉갑에 이렇게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는 건 뛰어난 화가도 하지 못할 일입니다.”
“그러고 보니…….”
힐데스의 말대로 잘 그리긴 잘 그렸다. 어디서 그림을 배운 걸까. 내가 멀뚱히 쳐다보고 있으니 힐데스가 책상 위에 올려놓았던 투구를 들어 제 옆구리에 끼웠다.
“아무튼 저는 이제 업무를 보러 가봐야겠습니다. 인사차 들린 것이었으니.”
“업무라면 십인의 의적이라는 강도들에 관련된 것인가?”
“그것도 있지만 현재는 백작령에 거주하는 마녀들의 노사분규 사태를 진정시키는 게 먼저입니다. 균형의 교단에서 나서기 전에 처리해야 쓸데없는 잡음이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말입니다.”
“아. 그렇군. 고생이 많네.”
“고생이야 강도 놈들을 잡기 위해 머리를 싸매는 섭정 각하께서 하고 계시지요. 저는 그저 몸을 움직일 뿐이니까요. 하여간 골치가 아픈 일들이 요즘엔 왜 이렇게 많이 일어나는지.”
한숨을 짧게 내쉰 힐데스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재차 말씀드리지만 이런 시기에 섭정의 역할을 맡으셔서 마음고생이 많으십니다. 강도 녀석들이 자수라도 해주면 섭정 각하께서 일처리가 좀 더 편하실 텐데 말입니다.”
“자수라…….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만 이정도로 치밀하게 범죄를 계획하는 녀석들이 자수를 할 것 같지는 않네.”
“그렇긴 하지요.”
안타깝다는 듯 혀를 쯧쯧 차던 힐데스가 마침 생각난 것처럼 입을 벌렸다.
“아.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강도 놈들의 우두머리를 잡는다면 직접 심문을 한 번 해보십시오. 섭정 각하께서 삼 년 전쯤에 추적하시던 범인과 살해 수법이 매우 유사하더랍니다.”
삼 년 전이라면 부녀자의 남편을 잔인하게 살해하고 집을 불태운 그 녀석 말인가? 머릿속에서 단편적인 기억들을 떠올린 내가 심란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붙잡게 된다면 한 번 조사해보지.”
*
검은 밀밭 주점의 지하실.
열 명의 강도, 통칭 ‘십인의 의적’이라 불리는 자들이 각자의 무기를 점검하며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두목. 어제 기사 새끼들 허탕치고 돌아가는 거 보셨습니까? 바로 근처까지 왔으면서 아무것도 못 건지고 돌아가더랍니다.”
애꾸눈의 부두목이 낄낄거리며 말하자 두건을 쓴 두목이 뻐드렁니를 드러내며 마주 웃었다.
“귀족들 털어버린 돈 좀 뿌리니까 멍청한 영지민들이 우리 편을 들어준 덕분이지. 의적은 개뿔. 그 새끼들은 우리가 얼마나 해쳐먹는지도 모를 거야.”
“암요. 머저리 같은 놈들이 뭘 알겠습니까.”
부두목의 너스레에 지하실에 한차례 웃음소리가 터져나갔다. 두목은 부하들의 웃음소리를 배경삼아 밀주 한 잔을 입에 들이부었다. 달달하면서 톡 쏘는 맛이 일품이다.
‘멍청한 기사 녀석들.’
벌써 한 달이나 귀족들을 털어먹고 있는데 제대로 된 조사는커녕 이쪽에 대한 실마리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조사에 난항을 주려고 영지민들 몇몇을 돈으로 매수하여 거짓 증언을 하게 만들고, 불특정 다수에게 갈취한 돈의 일부를 뿌려대었으니 민심은 절로 이쪽의 편이 되었다.
‘십인의 의적’이라는 바보 같은 칭호까지 만들어 줄 정도이니 말 다한 것이다. 그래도 꼬리가 길면 언젠가 잡힌다. 앞으로 한 달 정도만 더 해먹고 공국으로 도망치리라.
머릿속으로 계획을 짜는 와중 부두목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두목. 일주일 전에 고맙다면서 저희한테 우유를 주고 간 여식이 있잖습니까? 고 년 빨통도 좋고 얼굴도 반반한데 백작령을 뜨기 전에 함 찾아가서 돌려먹으시겠습니까?”
여자에 미친 놈 같으니. 두목은 혀를 끌끌 차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의적 놀음을 그만둘 때가 되면 한탕 하고 가야지. 그년 가족 다 죽여버리고 종일 돌려먹자고.”
두목의 말에 부하들이 환호성을 내지른다. 예쁜 여자를 강간한다는 사실에 모종의 희열을 느낀 것이다.
그러나 환호가 오래가지는 않았다.
쾅!
지하실의 문을 막아놓은 판자가 튕겨져 나가 바닥을 구른다. 놀란 두목이 고개를 돌리자 아름다운 은발에 붉은 눈동자를 번뜩이는 여자가 문턱에 서 있었다.
‘엘프?’
양 귀가 뾰족하다. 동화 속에서나 볼 법한 종족을 목도함에 할 말을 잃고 있자, 엘프가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귀 뒤편으로 넘기며 입을 열었다.
“너희들 때문에 내 장난감이 고장 났어. 고치러 왔으니까 반항하지 마. 너희, 지금 당장 백작 성으로 가서 범행을 자수해. 대충 테오라드가 두려워서 자수했다고 말하면 될 거야.”
이건 무슨 개소린가. 두목이 허탈하게 웃음을 흘리니 엘프가 무감정하게 두 눈을 깜빡였다.
“뭐해? 자수하러 안 가고?”
부하들 사이에서 소탈한 웃음이 번져나간다. 자수? 자수를 할 거였으면 범죄를 저지르지도 않았다.
“미친년이 강간당해 뒤질려고 환장을 했구나.”
두목이 미간을 찌푸리며 무기를 들어 올리자 부두목과 부하들도 각자 연장을 챙기며 킬킬거렸다. 그 모습을 본 엘프가 한숨을 내쉬며 양 손을 들어 펼쳤다.
“십.”
십? 십 초를 줄 테니 무기를 버리란 소린가? 하도 어이가 없는 바람에 웃음도 나오지 않는다. 십 초면 네 년의 사지를 잘라내는 것도 가능하다는 걸-
“구.”
퍼엉!
부두목의 머리가 터지며 뇌수가 사방에 튀긴다. 머리가 사라진 목이 분수처럼 피를 뿜어내다가 바닥에 털썩 쓰러진다.
‘뭐, 무야? 대체?’
어이가 없는 광경에 상황판단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다들 주춤거리며 당황하는 와중에 엘프가 손가락을 하나 더 접었다.
“팔.”
펑!
무리의 끝자락에 있던 부하의 머리통이 터져 벽면에 피를 흩뿌렸다. 머리를 잃은 몸이 휘청거리다가 벽에 처박혀 쓰러진다.
“무아악!”
“히, 히이익!”
공포에 질린 부하들이 하나 둘 쓰러지며 비명을 내지른다. 그제야 상황이 파악된 두목이 온몸을 떨면서 엘프를 돌아보았다.
‘이, 이건…….’
손가락 열 개를 펼친 건 십 초를 준다는 게 아니었다. 저건 그저 우리의 목숨을 손가락으로 표시하고 있던 것뿐이었다. 손가락이 하나 더 접히는 순간 이곳의 누군가가 죽고 만다.
그게 자신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자 다리에 힘이 풀리고 머릿속에는 살고 싶다는 비명만이 울릴 뿐이었다.
천천히 접히는 엘프의 세 번째 손가락. 기겁한 두목이 들고 있던 무기를 버리고 바닥에 무릎을 찍었다.
“요, 요, 용서어…….”
목소리가 떨려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확장된 동공에서 눈물을 흘려가며, 두목이 처절하게 소리쳤다.
“자수할 테니 용서를 바라겠습니다, 제바알─!”
그 끔찍한 외침에, 부하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였다.
성에서 간단하게 점심 식사를 마친 나는 마르한과 함께 영지를 순찰하였다.
순찰의 주 목적은 피해를 입은 귀족들에게서 직접 목격담을 듣는 것. 백작 각하의 사병들이 귀족들에게 거리감을 느껴 제대로 조사하지 못했던 부분이 많았기에, 내가 직접 발로 뛰어서 제대로 된 조사를 행할 셈이었다.
“습격을 당했을 때 말인가요? 흐음.”
지금 내게 취조를 받고 있는 귀족은 ‘십인의 의적’에게 첫 번째로 강도를 당한 사람이었다.
듣기로는 예전에 백작 각하의 사병들이 조사차 집을 방문했으나, 화가 많이 났던 귀족이 ‘내가 시정잡배들에게 강도짓을 당했다는 걸 만 천하에 알릴 셈이냐!’라고 일갈해서 조사를 포기했다고 한다.
이번에도 비슷한 이유로 문전박대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푸른 깃발 기사단의 여기사인 마르한과 사병 몇 명을 대동하여 찾아오니 태도가 무척이나 유순하였다.
내가 섭정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도 이 귀족의 태도를 순하게 만든 것에 한 몫 했을 것이다.
“……집으로 가는 지름길을 이용하기 위해 골목에 들어섰을 때였습니다.”
귀족은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는 건지 미간을 찌푸리며 침음을 흘렸다.
“복면을 쓴 괴한들이 골목의 앞뒤를 막으며 들이닥치더군요. 제 종놈이 당황하며 무기를 꺼내든 순간 단검이 날아와서 어깨를 꿰뚫었습니다. 그리고는 보라는 듯이 걸어와서 종놈을 무자비하게 패버리더군요. 죽일 기세로요.”
귀족은 건들지 않고 노예만 죽였다라. 귀족을 죽이면 사건이 커진다는 걸 알고 한 행동이었을 터.
거기다 귀족이 골목에 들어설 때를 노렸다가 앞뒤를 막음으로서 퇴로를 차단하고, 노예를 최대한 잔인하게 죽임으로서 귀족에게 공포감을 심어주었다.
첫 범행부터 이리 계획적이었다면 초범이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무서워서 떨고 있으니 제게 손을 내밀더군요. 가지고 있는 귀중품과 돈을 모두 내놓으면 살려준다는 식의 협박이었습니다. 별 수가 없었기에 저는 가지고 있는 물건을 다 넘겨주었고요. 그게 끝입니다. 더 이상은 저도…….”
“노예를 어떤 식으로 죽였습니까? 둔기만 사용했나요?”
마르한의 말이었다. 내가 묻고 싶었던 질문이기도 하고. 귀족은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날카로운 자상이 몇 개 있었습니다. 끝이 뾰족한 무언가…… 아마도 첨단을 예리하게 간 단검이겠지요. 목을 찌르면 확실하게 죽일 수 있었겠지만 놈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마치 과다출혈로 죽게 만들려는 것처럼 말입니다.”
단검으로 몸을 난도질했으나 일부러 숨을 끊지는 않는다. 죽어가는 사람의 마지막 모습을 즐기기 위해서. 어떻게 봐도 비인간적인 처사였다.
‘설마.’
삼년 전. 부녀자의 남편을 무자비하게 살해하고 집을 불태운 놈과 범행 방식이 유사하다. 그놈을 떠올린 내가 입을 달싹였을 때였다.
“서, 섭정 각하!”
방문을 열고 사병이 급히 들어온다. 내가 데리고 온 병사가 아닌데. 성에서 여기까지 달려온 건가? 뭔가 싶어서 빤히 바라보니 병사가 숨을 가라앉히곤 말을 이었다.
“기쁜 소식입니다! 강도 놈들이 모두 자수하였다고 합니다!”
“뭐?”
기쁘다기보단 당황스럽다. 놈들이 갑자기 왜 자수를 했단 말인가? 의아함을 담아 옆을 돌아보았으나 마르한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
말을 타고 성의 안뜰에 도착하니 병사의 말대로 포승줄에 손이 묶여있는 강도들이 보였다. 몽타주에 그려진 얼굴과 흡사한 것은 물론이고 범행 때 쓰였던 무기들도 잘 보존되어 있어서 이 놈들이 ‘십인의 의적’이라는 게 명확해졌다.
“어처구니가 없군요.”
“그러게 말이다.”
마르한의 말을 받아친 내가 안장에서 내려 바닥에 착지하였다. 마르한 또한 말에서 내려 내 뒤를 따라온다.
“섭정 각하!”
안뜰에서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던 기사가 나를 발견하고는 가까이 다가와서 군례를 척 올렸다. 묘하게 들뜬 얼굴이었다.
“쾌거를 이루신 것에 축하드립니다!”
“쾌거라니?”
“아. 이 놈들이 글쎄 섭정 각하가 두려워서 자백했다고 합니다. 좁혀오는 수사망에 위기감을 느낀 거겠지요. 섭정께서 이 골치 아픈 녀석들을 모두 사로잡았다는 걸 백작 각하께서 아시면 크게 좋아하실 겁니다!”
그게…… 말이 되나? 내가 강도들을 추적한 것은 기껏해야 이틀이었다. 한 달을 숨어지내던 녀석들이 이틀 만에 두려움을 느끼고 자수했다고?
이치에 맞지 않는 걸 떠나서 왠지 모를 위화감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기사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밝은 얼굴로 말을 이어나갔다.
“듣기로는 자수를 하자는 쪽과 자수를 하지 말자는 쪽이 나뉘어서 대판 싸움을 벌였답니다. 그 과정에서 부두목과 부하가 죽고, 싸움을 끝마친 놈들이 두목을 위시하여 자수를 하러 왔답니다.”
“둘이 죽었다?”
“예. 정확한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프레드 공자님께서 현장 감식을 해보겠다며 떠났습니다. 제 사견으로는, 몽타주도 일치하고 범행 수법까지 막힘없이 줄줄이 말하는 걸 보니 이놈들이 진범이 맞습니다.”
“그런가. 두목은 누구지?”
“저기 저 놈입니다.”
“그렇군.”
애써 무덤덤하게 대답한 내가 기사를 지나쳐 두목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포승줄에 묶인 두목은 내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내렸다.
“너. 이름을 말하라.”
“……머넌이라고 합니다.”
“하리아를 아나? 삼 년 전에 남편과 집을 잃었던.”
“그, 그럴 리가요. 저는 방화를 한 적이 없습니다.”
“방화?”
내가 싸늘한 안색으로 머넌을 내려다보았다.
“이상하군. 집이 불타서 없어졌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는데.”
“그, 그것이…….”
눈을 떨던 머넌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가, 내 뒤편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마, 맞습니다! 삼 년 전에 제가, 제가 그 년의 남편을 죽이고 집을 불태웠습니다! 죄, 죄송합니다!”
악마라도 본 것처럼 덜덜 떠는 모습이 이질적이다. 대체 왜 그러나 싶어서 뒤를 돌아보자, 헛간 앞에서 메이드 정복을 잘 차려입은 엘프가 이쪽을 무감정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엘프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표정을 바꾸며 슬프게 중얼거렸다. 거리가 있어서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대충 입모양을 살펴보면 ‘저는 벌을 받아야 해요 주인님’같은 것들이었다.
‘혹시나 했더니…….’
이제 좀 이해가 간다. 엘프가 이 놈들을 추적한 후에 자백하라고 모종의 협박을 건넸구나. 그러지 않고서야 강도단의 두목이라는 작자가 엘프 노예를 보고 겁에 질릴 리가 없었다.
이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한숨을 내쉬고 있으니 기사가 성큼성큼 걸어와서 머넌을 걷어찼다. 둔탁한 소음과 함께 머넌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바닥을 구른다.
“케헥, 켁……!”
“어디서 감히 섭정 각하 앞에서 말을 번복하느냐! 병신 같은 범죄자 놈이!”
윽박을 지른 기사가 혀를 쯧 차고는 나를 돌아보았다.
“각하. 놈들을 어떻게 처리할까요? 효수하여 저잣거리에 내거는 게 어떻겠습니까?”
나도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투옥시켜라. 시급한 일이 아니니 백작 각하께서 복귀하신 이후에 처벌을 결정하겠다.”
“아, 넵! 그럼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놈들아! 들었으면 빨리빨리 움직여!”
내 명령을 들은 기사가 쉬고 있는 병사들에게 고함을 내지르며 안뜰을 가로지른다. 병사들은 구시렁거리면서도 기사의 말에 따라 범죄자들을 붙잡아 일으켰다.
그 광경을 잠시간 지켜보던 내가 엘프의 눈치를 보며 마르한의 철갑을 툭툭 두드렸다. 마르한이 물음표를 띄우며 나를 돌아본다.
“왜 그러십니까?”
“마르한. 지금부터 내가 자네에게 아주 특별한 임무를 내리도록 할 걸세. 밖으로 새나가면 안 되는 중대한 임무야. 자네의 가문과 기사의 명예를 걸고 내가 내리는 명령을 함구하겠다고 맹세해줄 수 있겠나?”
마르한의 얼굴에 걸린 의문이 더욱 짙어진다.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사건이 다 해결된 찰나에 따로 중대한 임무를 맡기겠다니? 나 같아도 뭘 맡기려는 건지 짐작이 안 가서 고개를 갸웃거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내게 있어서 중대한 임무가 맞았다. 내 생존과 가문의 존립으로 직결되는 문제였으니까. 더는 집무에 열중한다는 변명으로 빠져나갈 수 없게 되었으니까…….
“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마르한이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저의 주군은 백작 각하이시나, 섭정 역할을 수행하는 테오라드 자작님 또한 형편상 저의 주군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백작 각하의 의지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라면 제 가문과 기사의 명예를 걸고 명령을 함구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네.”
마르한이라면 어쩐지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헛기침을 내뱉은 내가 다소 조심스러운 어투로 속삭였다.
“혹시, 성의 지하에 고문 도구가 남아있는가? 성적(性的)인 도구로 쓸 수 있는 거라면 좋을 것 같은…….”
거기까지 말했을 때, 마르한의 얼굴에 나에 대한 혐오가 스며들었다.
“아니.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라…….”
억울하고 비참한데.
어디 말할 때가 없었다.